




학생시절에 실시간으로 읽다가 최애캐 사망 이후로 그대로 접은 순정만화를 최근에서야 다시 읽었다. 내가 접은 부분에서 몇 권 안 가서 엔딩이라 새로 알게 되는 내용은 적었지만(그나마도 트위터에 유명한 짤로 돌아다녀서) 시야는 확실히 넓어져 좋았던 부분만 훑으려 한다. 장단점이 분명한 작가인만큼 후반부 사방으로 뻗어나가서 정리 안 되는 난해한 전개 같은 건 길게 얘기할 필요가 없으니…. 늘 생각하지만 순정만화는 감성만 전달되면 OK~. 사실 씨엘보단 플라티나를 먼저 써야하는 게 아닌가 싶지만 게시판을 만들기 전에 읽은 거니 고이 접어서 보냄.
가장 좋아하는 캐는 라리에트 킹 다이아몬드. 괴력을 지닌 무도파 집안에 아름다운 외모, 문무겸비, 올바른 이념. 말그대로 다이아몬드를 깎아서 만든 캐릭터 같다. 초반에는 경쟁심을 불태우며 라이벌 포지션을 자처하지만 이비엔과 패밀리어로 엮이며 성장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상당히 긴 후반부를 이비엔 없이 홀로 보내고 끝내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되는데 (…) 읽을 당시의 내가 어리기도 했지만 이 행보를 받아 들일 수 없었기에 접은 거기도 하다. 이 둘의 호시절이 언제인가요? 라고 묻는다면 나는 이거.
▼ 이건 그냥 제가 좋아하는 거고요
▼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 언제냐면 이 장면입니다
라리에트와 이비엔이 잉꼬부부처럼 무한한 신뢰를 보내기 전까지의 과정이 생각보다 길기 때문에 캐릭터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시절을 마음껏 볼 수 있는데…. 라리에트가 대의와 명예를 위해 가장 소중한 것(자신의 목숨,패밀리어)를 희생할 수 있는 면모가 무섭게 느껴질 때가 있다. 대뜸 완결권 이야기부터 하자면 이비엔이 시간을 돌려 라리에트에게 도달했을 때 자신의 의지와 함께 살아달라는 유언과 함께 자결하고 (너무해!!!!!!) 그대로 삶의 지표가 되었고 포기하고자 했던 이비엔을 운명의 붕어빵 틀에 넣기 성공하는데….
결국 크로히텐의 인류애와 라리에트의 대의가 만나 한 밀가루 반죽을 붕어빵으로 만든 이야기잖아! 커피우유신화인데 둘이서 만든 커피우유도 아니고 셋이서 만들었어요~. 하나만 남았어요(ㅠㅠ)라서 엔딩 이후에 느껴지는 공허함도 한몫한다. 이비엔은 자신의 공허를 라리에트로 메웠지만 독자인 전 어떡하냐고요? 엔딩이 마음에 드는 것과 별개로 아주 개운하지도 않아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다.
가장 완벽한 밸런스는 역시 주인공 4인방이 생존한 학원 시절이라 생각하는 한 편 도터의 캐릭터성이 당시엔 파격적이었기 때문에 유독 강렬하게 남아있기도 하다. 복수를 위해 살아가는 마고트의 사연 자체도 쇼킹하지만 이 둘의 CP캐미 때문에 좋아하던 것도 있고…. 1부 2부 나뉜 것처럼 라리에트 사망 이후엔 이 둘도 탈옥과 이것저것의 도피 생활로 까마득하게 먼 존재가 되기 때문에 바뀐 캐릭터성에 아쉬움을 느끼기도 한다. 이쪽은 이비엔과 달리 외부 압력으로만 빚어낸 케이스인데 (사람 때문에 포기하는 것 외에 다른 선택을 잘 하지 않음) 이쪽이 오히려 정석의 맛이라 생각해서 안타까움이 더한 페어기도 하다.
주인공 4인방의 과거라고 하면 일단 '태어나고 보니 이렇게 태어난 존재'라고 설명하는 게 전부일만큼 심플한데 (그에 비해 복잡한 출생) 도터와 라리에트는 자신이 원하는대로 삶을 개척해서 갈아가고 나머지 둘은 서로의 파트너, 혹은 주변의 영향으로 더듬더듬 길을 찾아간다는 것이 재밌다. 그래서 조합이 이렇게 짝지어진 거겠지? 도터의 설정은 솔직히 사족이라 느낄 수준으로 비대해져서 후반가선 될대로 되라였는데 결국 제뉴어리가 마지막에 먼저 떠나는 걸 그리고 싶어서 하셨겠구나 싶기도 했다. 참 상실을 좋아하는 작가님이야….
▼ 좋아하던 무드가 딱 이쯤이었다.
▼ 작품에서 가장 오래 곱씹은 장면은 이건데 거머리 시점이라고 생각하면 좀 황당하기도 합니다
유사가족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셜리-이비엔도 좋았지만 마고트-루시만큼 자꾸 떠오르는 관계도 없을듯
인간 하나 여럿이서 잘 제련해서 검만드는 이야기 좋아하는데 씨엘은 그 중에서도 독특한 케이스라 좀 더 산뜻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대중픽인가? 보통 외부의 시련과 비운의 탄생으로 시작하는 다크판타지가 많은데(뺨 백팔번 쳐서 부처 만들기 프로젝트) 이비엔의 붕어빵틀은 세계의 의지도 있지만 가장 사랑하는 이들이 택해준 길이고 이 과정에서 도구로 여겼다는 느낌이 별로 들지 않아서겠지…. 이른바 세상이 너를 적으로 돌렸어!에 억울함이 없고(ㅋㅋ) 스스로를 포기했던 과정에서 재기할 수 있었던 것도, 다시 포기한 것도 결국 가장 좋아하는 상대에 의해 만들어진 운명이다. 사람 관계의 이야기가 재미없을 수 없는데 이비엔이 변화하는 과정은 외부의 사건이나 시련이 아니고, 그 사건과 시련을 맞닥뜨렸을 때 '내 소중한 사람들이 어떻게 대처하느냐'로 변하는 이브이다.
순정 카테고리에 들어갈 수 있는 이유도 사람을 만나 스스로 변화를 택했기 때문이고 그 의지 자체로 산다는 것. 라리에트가 정말로 이비엔의 생명이 되는 과정을 이야기를 백합적으로 생각한 어쩌고 저쩌고 후기를 쓸까 했는데 이것에 대해서는 재밌는 후기를 발견해서 아래 달아두는 것으로 그친다. (7년 전에 쓰신 후기 발굴해서 미안합니다 그치만 명문이라 리플란에 달아둠)
인간이 어떠한 극한의 시련을 뛰어넘고 다른 존재로 변모하는 이야기는 왜 재밌을까? 신화적인 요소도 있지만 정점에 닿는 것이 가장 최종다운 마무리라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마지막에 다시 태어난 크로히텐과 마주하지만 둘이 다시 이어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전혀 들지 않고 (바라지도 않음) 이비엔은 지금이 완성된 존재인 것이다. 이 상태로 1권 펼치니 이비엔 정말 어리고 순박해서 마음이 안 좋아…. 초반 라리에트의 시점으로 본 이비엔은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하는데 학생들 사이에선 과시욕과 허영심이 있다고 언급되는 파트를 좋아한다. 사실 그 모습을 내비치는 것까지가 어느정도 라리에트에게 어울리는 파트너의 자리 매김이라 생각해서겠지만 쩝.
결국 죽어서 완벽하게 성립된 관계라고 생각해서 씨엘에서만 볼 수 있는 대체 불가능한 관계성이다.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도 결국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유니크함과 수려한 문장이 남기는 존재감 때문이겠지…. 오랜만에 괜찮게 재독해서 후기 남기고 가는데 쓰고자 한 게 한 달 전이라 7월 후기가 되고 말았다…. 보송과 련님을 위해 달리는 중~. 읽고 싶지 않은 내용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미 저지르는 중.
▼ 별 감흥 없이 봤던 장면인데 나중에 다시 보니까 영원한 아군이 되었다는 게 자꾸 상기되서 좋은 느낌 걸어둠
그리고 읽고 나니 의외로 생각나는 헌신짝 픽은 크로히텐이었다. 위에서 이비엔은 이토록 인류를 구할 것, 신의 역할을 부여받을 것. 수많은 책임에 휘둘리면서도 이비엔 자체가 도구라는 감상은 들지 않았는데(개인 감상이고 사람마다 편차 있음) 스스로를 지독하게 도구화했다고 느껴지는 건 오히려 크로히텐이었다. 사랑한다는 행위도, 사랑하게 된 대상도. 그의 처후도 철저하게 스스로를 깎아내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라리에트는 실제로 자신의 욕심대로 이비엔의 생명이 되었지만 크로히텐의 사랑은 계속 부정 당하거나 의심 당한다.
이비엔 본인도 자신의 존재의미와 세계가 부여한 사명을 알기 때문에 그의 사랑을 순수한 자신의 것으로 느끼지 못하는데 과거 절벽에서 이비엔 찾기 과정에서 보면 알 수 있듯이(ㅠㅠ) 크로히텐의 사랑이 진실일지언정 닿을 수 있는 마음은 아니다. 가장 깊을 곳을 파헤쳐도 결국 이비엔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라리에트고 그것을 옮길 수 있을뿐. 크로히텐의 삶도 대충 그러하다. 사랑할 순 있지만 인정받을 수 없다.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부정해서 죽을지언정 본인에겐 아픔일뿐 정당할 수 없다. 이런 간극에 가장 좋아하는 장면이 크로히텐의 최후인데 얼터 크로히텐의 존재는 너무 당황스러워서 살짝 기억에서 지우겠습니다(싫은 건 아님) 헌신짝 매달도 수여했으니 짤 하나 만들어서 던지고 감. 재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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